내년 7월 장애등급제 폐지 이후 실시될 ‘맞춤형 서비스 종합조사’를 시뮬레이션한 결과 시각장애인은 폐지 이전보다 활동보조사 지원 시간이 7.63%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25만 시각장애인을 대표하는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한시연)는 종합조사 계획을 전면 수정해 달라는 요구서를 지난달 보건복지부에 전달하는 등 반발하고 있다.
장애인 단체들은 장애등급제 폐지 이후 시행될 종합조사표가 다양한 장애 유형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아 ‘또 다른 등급제’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는 오는 18일부터 등급제 폐지 이후 서비스 지원을 보완해 달라는 시위에 돌입할 예정이다.
국민일보가 4일 입수한 ‘장애등급제 폐지 민관협의체 제9차 회의자료’에 따르면 장애등급제 폐지 이후 시각장애인에 대한 월 활동보조사 지원 시간은 기존 119시간51분에서 110시간38분으로 7.63% 감소한다. 반면 자폐성장애인, 뇌병변장애인의 경우 활동지원 서비스 시간이 각각 11.86%, 8.69% 늘어난다. 이는 복지부가 기존 수급자 1886명을 대상으로 모의적용을 한 결과다. 전체 장애인 중 장애등급제 폐지 이후 활동 지원을 아예 받지 못하게 되는 비중은 13.52%(246명)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말 정부는 장애 정도에 따라 1∼6등급으로 나누던 등급제를 폐지하겠다고 발표했다. 대신 개인별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남의 도움이 필요한 정도를 점수화해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겠다고 했다.
문제는 맞춤형 서비스를 판단하는 종합조사표에 시각장애의 특성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으면서 불거졌다. 복지부가 공개한 ‘장애인 서비스 지원 종합조사(안)’에 따르면 장애인들은 옷 갈아입기, 구강청결, 청소 등 일상생활 동작에서 지원 필요 정도에 따라 4단계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 김영일 한시연 부회장은 “누운 상태에서 자세 바꾸기 등 지체장애인을 위한 평가 항목은 많은 반면 낯선 곳은 이동 자체가 불가능한 시각장애인의 특성을 고려한 항목은 한두 개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배변·배뇨에 지원이 얼마나 필요하느냐’는 질문의 경우 시각장애인은 ‘전적 지원 필요’보다 ‘일부 지원 필요’를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시각장애인은 화장실로 이동하는 게 힘든 것이지 배변 자체가 어렵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시각장애인은 서비스 지원에 필요한 점수가 뇌병변장애 등 지체장애인보다 부족해진다.
지난 3일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장애등급제 폐지 시행을 위한 장애인 단체 토론회’에서 만난 강모(46)씨는 “발달장애인 아들과 시각장애인 아들을 키우고 있는데 종합조사표대로면 시각장애인 아들에 대한 혜택을 줄여 발달장애인 아들에게 주는 것 아니냐. ‘또 다른 등급제’에 불과하다”고 토로했다.
한시연이 지난달 복지부에 제출한 요구서엔 시각장애를 고려한 항목, 즉 시각장애인 전용 평가지표의 이상적인 예시가 제시돼있다. 낯선 장소에서 화장실 위치 확인이 필요한지, 자필로 서류 작성이 가능한지, 컴퓨터 화면 읽기가 가능한지 등 시각장애의 특성을 반영한 질문들이다.
다른 유형의 장애인들도 비판의 목소리를 높인다. 강재희 한국농아인협회 상임이사는 “맞춤형 서비스를 기대했는데 청각장애인에게 필수적인 ‘의사소통 지원 서비스’가 누락돼 있다”고 지적했다. 김태현 한국뇌병변장애인인권협회 정책실장은 “장애를 중증과 경증으로 나눈다고 하는데 뇌병변장애는 경증이어도 혼자 이동이 힘들다. 다양한 장애 유형들의 복지 욕구를 하나의 조사표로 분류할 수 없는 만큼 15가지 장애 유형별 평가지표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는 “예산은 한정됐는데 하나의 파이 안에서 서비스 지원 정도를 조절하려다 보니 다른 유형 장애인 간 ‘동족상잔(同族相殘)’만 일어나고 있다”며 “등급제 폐지의 핵심은 맞춤형 서비스 시행을 위한 신규 지원 신설인데 복지부가 새로 내놓은 지원 서비스들은 모두 기존과 같다”고 꼬집었다.
복지부 관계자는 “정신장애, 발달장애 등 일상생활에 도움이 많이 필요한 장애를 위한 항목을 새로운 조사표에 추가하다보니 시각장애인이 점수를 잘 받을 수 있는 항목이 줄었다. 제기된 문제를 반영해 최종 조사표는 장애인 간 형평성을 맞추겠다”고 말했다. 다만 “예산이 한정적이어서 장애 유형 간 활동지원 필요 정도를 비교해야 하는 건 어쩔 수 없다. 장애 유형별로 평가지표를 만들긴 어렵다”고 말했다.
안규영 기자 kyu@kmib.co.kr